경주교촌마을에는 최부자 고택을 중심으로 향교와 전통한옥이 많이 남아있으며, 가까운 곳에 월성, 월정교, 첨성대, 계림, 고분 등 소중한 신라유적이 있어 신라문화 속의 조선문화가 공존하는 특별한 곳이다.
신라 신문왕2년(682)에 설립한 신라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있던 곳으로 교육기관인 국학의 변화는 고려시대에는 향학,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졌다.
마을의 이름이 ‘교동’, ‘교촌’, ‘교리’ 등으로 불린 것은 모두 향교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원효스님과 요석공주의 사랑을 이어준 문천교(蚊川橋)터, 김 유신이 살던 재매정, 월정교와 충담스님, 도화녀를 사랑한 진지왕, 선덕여왕이 만든 첨성대 등 수 많은 이야기 현장이 교촌과 남천을 따라 흩어져 있다.
경주최부자댁
최부잣집은 400년 동안 9명의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집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는 정무공 최진립(貞武公 崔震立,1568~1636)장군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워 가문을 일으켜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가암, 개무덤)에서 7대를 살았고, 교동에서 5대를 살아 12대만석꾼으로 유지하며 살았다.
7대 남강 최언경(1743~1804)과 아들 용암 최기영(1768~1834)은 교촌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우고 18세기 말 이조리에서 살던 집을 허물어 교촌마을 향교서편으로 옮겨와 현재 까지 살게 되었다.
경주향교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경주향교 자리는 신라시대의 ‘국학’이 있던 곳이다. 국학은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세워졌는데 오늘날의 국립대학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에는 향학으로,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지방교육의중심 역할을 했다. 경주향교는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33년(1600)에 대성전을 비롯한 제향공간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을 비롯한 강학공간을 지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매년 봄과 가을에 전통 유교의식인 석전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경상북도 내에서는 가장 큰 규모이며, 나주향교와 함께 ‘전묘후학’의 건물 배치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월정교
『삼국사기』에 의하면, 760년 경덕왕(景德王 19) 때에 “궁궐 남쪽 문천(蚊川) 위에 일정교(日淨橋), 월정교(月淨橋)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춘양교(春陽橋)라고도 불리었던 일정교는 월정교의 동쪽으로 약 700m 상류에 위치해 있었다. 월정교(月淨橋)는 조선시대에 와서 월정교(月精橋, 淨 ⇨ 精)로 표기되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길이 60.57m의 월정교 아래 교각 사이에서 불탄 목재와 기와편이 출토되어, 교각 윗면이 누각과 지붕으로 구성된 누교(樓橋)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센 물살에 견디도록 교각을 배모양으로 쌓았다. 현재의 월정교는 10여 년의 복원공사 기간을 거쳐 2018년에 완공된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목조다리이다.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단청으로 새로운 볼거리로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