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촌마을 주변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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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진정사

  • 위치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서로 180-48 (왕동)

  • 문의 및 안내

    광산구청 문화체육과(문화재) 062-960-8252

  • 신용카드 가능여부

    없음

개요

* 호남 의병활동의 본거지, 용진정사 *
용진정사는 용진산 남쪽의 산록에 자리잡고 있다.
한말의 도학자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先:1851∼1931)이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자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용진산에 강당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쓴 곳으로서 한말 호남
의병활동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이곳은 원래 용진사가 있던 곳으로 삼봉 정도전,
우암 송시열 등이 다녀갔던 곳으로 전해진다.
 
절이 허물어진 뒤 청안이씨들이 그 터를 가지고
있었으나, 후석이 정사를 짓는다는 말을 전해듣고 옛 절터의 상대와 중대를 희사함으로써
정사를 지을 수 있었다. 후석이 별세한 뒤 문인들이 정사 동쪽에 3칸의 용진영당(湧珍影堂)을
세우고 1924년 석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를 모셨다. 영당의 좌우벽에는 큰아들 북파
오헌수와 둘째 아들 도호 오동수의 영정이 함께 걸려있다.
 
* 일제강점기의 의병, 후석 오준선 *
후석은 본관이 나주이며 광산구 도덕동 도림마을에서
오하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백부 향규에게 입양되었다. 8세 때부터 이웃에 사는
친척 오태규로부터 사서와 근사록을 배웠다. 이어 18세 때부터 노사 기정진에게 배웠으며,
이를 계기로 송사 기우만, 식재 기재, 현와 고광선 등과 사귀었고, 전재 임헌회,
입재 송근수 등에게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 그의 학문 체계는 경학, 성리학, 예학,
의리론 등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1910년 일제는 명사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이라는
금품을 지급하여 하였는데, 이를 거절하자 헌병대로 끌려 가 갖은 협박을 가했으나
끝내 받기를 거절하였다. 이후 1917년 용진산에 들어가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학을 가르치니, 문하생이 600여명에 이르렀다. 1919년 고종이 승하 하시자 문하생들과
용진정사 앞의 바위에서 통곡하였는데, 그뒤 이 바위를 읍궁암(泣弓岩)이라 불렀고,
"원수를 갚기 전에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하여 일생동안 백립을 쓰고
지냈다. 명정에 조선유민이라 쓰도록 유언하였다. 1934년에 그의 학문적 체계를 정리한
문집 25권 12책이 간행되었다.
 
[문화재 정보]
지정종목  문화재자료  
지정번호  광주문화재자료 제7호  
지정연도  1985년 2월 25일  
시대  조선  
종류  가옥

유모차대여 여부

없음

애완동물 가능 여부

없음

홈페이지

광산구 문화관광 http://culture.gwangsan.go.kr 문화재청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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