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고장 강화도우리 강화는 상고시대로 부터 현세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사의 애환을 함께 하여 온 역사의 현장이며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만치 우리조상들의 숨결이 서려있는 고장이다. 경천애인과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으로 나라를 펼치신 단군성조께서 국태민안을 기원하셨다는 마니산 첨성단을 비롯하여 선사시대의 우리 조상들의 생활터전을 입증하는 고인돌의 유적지, 그리고 내우외환이 있을 적마다 나라의 방패역할을 하였던 고장이며, 내정의 혼돈속에 반정인물들의 유배지로써의 비운의 현장이고도 하였던 강화도, 그러기에 우리의 강화의 역사를 한국 역사의 축소판이라고 후세 사람들은 일컫는지 모른다. - 나의 사는 고향역사의 고장.-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는 고장.- 근면 성실하고 자랍정신이 강한 우리 고장 강화. 연리금월2리 아끌말과 연결된 부락이다.과거에는 연동이라 불렀다. 이 마을 북동쪽에 와야촌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강화 외성을 쌓을 필요한 전돌과 기와를 구워 그 연기가 북동풍을 타고 이 마을을 덮어 연기속에 마을이 항시 묻혀 괴로움을 당한 부락으로 연기 연(煙)자를 써서 연동이라 불렀다 한다. 지산 1리 / 2리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옛 신지동과 남산동 일부와 연동 일부를 합하고 신지동의 지(智)자와 남산동의 산(山)자를 따서 지산리(智山里)라 하였으며, 지산리에는 와야, 곡촌, 지산2리에는 남산, 신지의 자연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가리포들이라는 넓은 평야지가 있고 마을 주변에는 점질토양이 많아 조선 영조때 강도해변에 외성을 쌓을때 이에 필요한 벽돌(전돌)과 기와를 굽던 곳이 있어서 와야고을이라고 하였는데 "와야마을"이 "왜밀"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남산촌에는 고려시대 이전에 신지라는 고승이 신지동 뒷산에 절을 짓고 불도의 명성을 떨칠 때 남산뒤에 부락 뒷산에 등대를 세우고 남산대라고 부르던 것이 유래가 되어 남산뒤로라는 명칭이 붙었다한다. 신지돈에는 고려 원종5년(1264)에 창건된 신나동가궐터가 있었는데 동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선원사터로 고증되어 현재 발굴 조사중이다. 신정 1리 / 2리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신당동과 이정동 일부를 합하고 두 마을에서 한글자씩 따 신정리라 하였다. 이 지역에 운수물이란 우물이 있었는데 수질이 좋고 물이 맑을 뿐 아니라 수량도 많아 신축년 가뭄에 인근마을 에서도 물을 길어 갔다고 하여, 이 우물은 좋은 운을 주는 우물이란 전설이 있어 널리 알려졌었다고 한다. 1963년 행정리 분할시 도감촌과 가자촌은 신정1리로, 더리미와 신데이 부락은 신정2리로 분리되었다. 가자촌은 옛날 뒷산 계곡에 가재가 많아서, 도감촌은 훈련도감이 있었던 것이 마을이름의 유래다. 신당촌은 뒷산에 구시대에 신당이라는 기도처가 있어서, 더리미는 옛날 가리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가리미라 부르던 것을 더할가(加)자의 "가" 대신 "더"자를 붙여 더리미가 되었다고 한다.
지붕없는 박물관 강화도를 찾아서
♣ 교과과정 | 4-2 사회 1. 옛 도읍지와 문화재 |
♣ 학습주제 | 강화도 항쟁의 역사 |
♣ 교과과정 연계 둘러볼 곳 | 강화역사전시관, 고려궁지, 광성보, 전등사 |
♣ 교과과정 연계 체험학습 | 물놀이, 미꾸라지잡기, 연만들기, 짚풀공예, 농사체험 |
ㅇ 고려궁지
- 홈페이지 : 강화군 시설관리공단 http://www.ghss.or.kr
- 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강화읍)
- 개요 : 고려 고종 19년에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가 강화로 옮겨졌다. 이후 고려왕실은 원종 11년에 화의를 맺고 개성으로 환도한다. 이처럼 고려궁지는 몽고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로 1232년 6월 고려 고종 당시 항몽의 기치를 들고 강화에 도읍을 옮긴 후 2년 뒤인1234년에 관아와 궁궐의 규모가 완성되었다. 당시 불교문화의 정수인 팔만대장경이 이 곳 강화에서 만들어졌고, 금속활자도 개발되었는데, 1270년 5월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하면서 성과 궁궐이 무너졌다. 조선시대에는 행궁이 있었고 1637년 병자호란시에는 강화성이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어 치욕을 당하였다. 그 후 고려궁터에는 강화유수부의 건물들이 들어섰고, 현재 동헌과 이방청이 남아있다. 동헌은 강화유수부의 건물로서 1638년 인조 16년에 건립되었다. 이방청은 1654년 효종 5년 강화부에서 건립한 관아로서, 1783년 정조 때에 개수한 ㄷ자형의 건물로 크기는 79평 정도이다. 현재의 고려궁터는 1977년에 보수 정화한 것이다.
ㅇ 강화산성
- 홈페이지 : 강화 문화관광 http://tour.ganghwa.incheon.kr 문화재청 http://www.cha.go.kr
- 주소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국화리, 신문리, 관청리, 남산리
- 개요 : 강화읍은 고려시대 몽골이 침입했을 때 잠시 도읍을 옮겼던 곳으로 이와 관련한 유적들이 많다. 강화산성 역시 그같은 문화유산으로 고려시대에 쌓은 산성이다. 강화산성은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고자 착공되었다. 공사가 완공되기도 전에 강화도로 천도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1234년부터 본격적으로 축성되었다. 고려의 성은 내, 외, 중성이 있었는데 내성은 현재의 강화성으로 둘레가 7,122m이고 중성은 둘레가 5,381m로 1250년에 축성하였다. 외성은 1233년에 축조되기 시작했다. 이 성들은 모두 토성이었으나 1677년에 강화 유수 허질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석성으로 쌓았다. 1709년에 강화유수 박권이 다시 개축했고 조선 후기에 보수가 이어졌다. 강화산성에는 안파루(남), 첨화루(서), 망한루(동), 진송루(북)의 사대문과 암문, 수문, 장대 등의 방어시설이 있다. 강화산성은 구한말에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강화도조약 체결 등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강화나들길로 나들이 가자 강화 도래미마을
강화도의 도래미마을에는 문화와 역사와 자연이 한데 어우러졌다. 대몽항쟁 당시 팔만대장
경의 판각을 맡았던 선원, 군사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용진진, 화도돈대, 용당돈대를
만날 수 있다. 이름대로 아름다워서 또 오게 되는 섬마을이다.
새싹이 돋아나는 따뜻한 봄날이면 도래미마을에서는 감자를 캐고 버들피리를 만들고, 여름
이면 미꾸라지를 잡고, 옥수수와 오이를 딴다. 가을에는 고구마를 캐고 밤을 줍는다. 특산
품인 장준감도 딴다. 겨울에 들어서면 강화도의 별미인 순무김치를 담근다. 마을에서 수확
한 농산물을 한 아름 안고 돌아오는 길이 풍성하다.
도래미마을을 나서면 강화나들길 2코스 트래킹이 시작된다. 갑곶돈대에서 초지진까지 약
20km를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광성보에서 덕진진을 지나 초지진까지는 자전거 도로가
있어 왕복 약 9km의 자전거 라이딩이 가능하다. 강화나들길 2코스를 돌아보고 나면 나라
의 방패 역할을 맡아온 강화의 역사가 자랑스럽다.
지붕없는 박물관 강화도를 찾아서♣ 교과과정4-2 사회 1. 옛 도읍지와 문화재6-1 사회 1. 우리 민족과 국가의 성립♣ 학습주제강화도 항쟁의 역사♣ 교과과정 연계 둘러볼 곳강화역사전시관, 고려궁지, 광성보, 전등사♣ 교과과정 연계 체험학습물놀이, 미꾸라지잡기, 연만들기, 짚풀공예, 농사체험 ㅇ 고려궁지 - 홈페이지 : 강화군 시설관리공단 http://www.ghss.or.kr - 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강화읍) - 개요 : 고려 고종 19년에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가 강화로 옮겨졌다. 이후 고려왕실은 원종 11년에 화의를 맺고 개성으로 환도한다. 이처럼 고려궁지는 몽고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로 1232년 6월 고려 고종 당시 항몽의 기치를 들고 강화에 도읍을 옮긴 후 2년 뒤인1234년에 관아와 궁궐의 규모가 완성되었다. 당시 불교문화의 정수인 팔만대장경이 이 곳 강화에서 만들어졌고, 금속활자도 개발되었는데, 1270년 5월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하면서 성과 궁궐이 무너졌다. 조선시대에는 행궁이 있었고 1637년 병자호란시에는 강화성이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어 치욕을 당하였다. 그 후 고려궁터에는 강화유수부의 건물들이 들어섰고, 현재 동헌과 이방청이 남아있다. 동헌은 강화유수부의 건물로서 1638년 인조 16년에 건립되었다. 이방청은 1654년 효종 5년 강화부에서 건립한 관아로서, 1783년 정조 때에 개수한 ㄷ자형의 건물로 크기는 79평 정도이다. 현재의 고려궁터는 1977년에 보수 정화한 것이다. ㅇ 강화산성 - 홈페이지 : 강화 문화관광 http://tour.ganghwa.incheon.kr 문화재청 http://www.cha.go.kr - 주소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국화리, 신문리, 관청리, 남산리 - 개요 : 강화읍은 고려시대 몽골이 침입했을 때 잠시 도읍을 옮겼던 곳으로 이와 관련한 유적들이 많다. 강화산성 역시 그같은 문화유산으로 고려시대에 쌓은 산성이다. 강화산성은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고자 착공되었다. 공사가 완공되기도 전에 강화도로 천도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1234년부터 본격적으로 축성되었다. 고려의 성은 내, 외, 중성이 있었는데 내성은 현재의 강화성으로 둘레가 7,122m이고 중성은 둘레가 5,381m로 1250년에 축성하였다. 외성은 1233년에 축조되기 시작했다. 이 성들은 모두 토성이었으나 1677년에 강화 유수 허질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석성으로 쌓았다. 1709년에 강화유수 박권이 다시 개축했고 조선 후기에 보수가 이어졌다. 강화산성에는 안파루(남), 첨화루(서), 망한루(동), 진송루(북)의 사대문과 암문, 수문, 장대 등의 방어시설이 있다. 강화산성은 구한말에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강화도조약 체결 등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제1코스 : 김포 - 강화대교에서 좌회전- 2km도래미마을제2코스 : 김포 - 초지대교에서 우회전 - 12km도래미마을인터넷 검색창에 “도래미마을”을 치시면 홈페이지와 까페가 검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