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화마을 주변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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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46

충효동 정려비각

  • 위치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샘길 7 (충효동)

  • 문의 및 안내

    문화진흥과 062-510-1226

  • 신용카드 가능여부

    없음

개요

* 충장공 김덕령 장군 일가를 기린 비, 충효동
정려비각 *
충장공 김덕령(1567~1596) 장군과 그의 부인 흥양
이씨, 그 형 덕홍과 동생 덕진 일가족의 충, 효, 열을 기리기 위해 충효리 마을 앞에
세운 비각이다. 이것이 여느 문과 다른 것은 이 비각 앞의 현판에 새겨 있는 내용에서
"...1788년 정조가 윤음으로서, 표리비를 세우라" 이르고, 충효지리[忠孝之里]라는
마을 이름을 지어 하사한 점이다. 비는 1789년(정조 13년)에 세운 것으로 전면에는
비명 [朝鮮國贈左贊成忠壯公金 德齡 贈貞敬夫人 興梁李氏 忠孝之里]가 3행으로 새겨져
있다. 이 면에는 정헌대 부호조판서 서유린이 選하고 全羅道觀察使 서용보가 쓴 음기가
새겨져 있다.
비의 크기는 총 높이 220Cm, 기단 높이 110Cm, 비신
높이 171Cm, 비신 너비 68cm이며 비갓이 얹혀 있다. 비각은 정면 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이며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비각의 건립 연대는 1792년이며, 그
뒤 수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비각 전면에는 전주부윤 한용구가 쓴 정조어제윤음[正祖御製倫音]이란
현판이 있다.

* 김덕령 장군 일가에 대하여 *
비문에 나타난 김덕령 일가의 사적은 다음과 같다.
김덕령 장군 자는 경수 본관은 光山이며 오계 성혼에게서
글을 배웠다. 임진왜란 때 형 덕홍이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상중임에도 의거하여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의 천거로 종군의 명을 받고 의병을 모아 남원에서
훈련을 마친 뒤 선전관에 임명되어 권율 휘하에서 왜의 호남진출을 막는 데 힘썼다.
1594년 진해, 고성에 나가 의병장 곽재우와 협력하여 왜병을 물리치고 1595년에는
고성에 상륙하는 적을 격퇴하였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비가 상전의 권세를
믿고 군율을 어기므로 장살하여 한 때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자 대신들과의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때마침 이몽학의 난으로 그와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아
옥사했다. 후에 복권되어 1788년 의정부좌성에 추증되고 충장의 시호를 받았다.
* 흥양이씨 (?~1597) : 김덕령 장군의 부인으로 정유재란
때 왜병의 추격을 받고 순절했다.
* 김덕홍 (1558~15920) : 김덕령 장군의 형이며 호는
성암이다. 우계 성혼의 문인이며 임진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고경명 휘하에 참여하여
의주행재소로 가던 중 금산에서 왜병과 싸우다 전사했다.
* 김덕진 (1571~1627) : 김덕령의 아우이며 자는 자룡,
호는 풍암이다. 효성이 지극했다. 두 형을 잃은 뒤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지리산
백운동에서 난을 피하여 겨우 가계를 보존했다. 난 후에 풍암정을 짓고 독서로 일생을
보냈는데 인조 때 잠시 창릉 참봉으로 나가 있다가 더 이상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1785년에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유모차대여 여부

없음

애완동물 가능 여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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